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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우리를 자유케 하는가 (요한복음 8:31,32)

  • 박덕은 목사
  • 조회 : 3550


참고 : (신문 지상 설교) 훼잇빌 벧엘교회 박덕은 목사
                                                 

자유란 무엇인가

희랍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밝은 대낮에도 “어둡도다! 어둡도다!” 라고 외치면서  등불을 들고 무엇인가 찾으며 다녔다. 한 번은 알렉산더 대왕이 그를 찾아와 “선각자시여!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이 때 원통 속에 살면서 햇볕을 쬐고 있던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햇빛을 가리지 말고 비켜서주시오!”  

일반적으로 자유란 ‘억압이나 제한이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상태’ 를 말한다.  심리학자 마슬로우(Abraham Maslow)의 견해를 빌리면 ‘자신이 꿈꾸는 이상을 실현, 유지하는 상태’를 자유, 또는 자유를 누리는 상태' 로고 설명할 수 있다. 디오게네스에 있어서 자유는 빛이었고, 알렉산더에게 자유는 정복이었다.  
디오게네스는 물리적 힘으로 세계를 지배했던 알렉산더의 그림자 속에 가려져 있는 수많은 생명과 피흘림을 보면서 그에게 진리와 자유를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당신에게는 내가 찾는 진리와 자유가 없소!’란 의미로써 변치않는 진리를 상징하는 햇빛을 가리지 말고 비켜서주시오!” 라고 말했을 것이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더도, 그런 알렉산더에게 ‘네게는 빛과 자유가 없다’ 고 지적한 디오게네스도 결국은 자유를 찾지 못하고 죽었다.  자유란 인류 역사를 통해 추구해온, 그리고 지금도 추구하고 있는 진리이며 생명의 문제이다. 

인간은 과연 자유한가

우리 모두는 이 땅에서 오랫동안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면서 자신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며 살기 원한다.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이기도 한 이 것은 결국 부족함의 결과인 부자유로부터 벗어나고자하는 자유에의 추구이다.  

구약성경을 보면 야곱이란 사람이 나오는데 그는 잘 살기 위해 대단히 열심히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좋은 삶은 아니었다.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 사이에서 ‘야곱같은 사람’ 이라는 말은 ‘남을 속이는 자,’ ‘야비한 자,’ ‘자신의 유익이라면 남이야 어떻게 되던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 라는 의미로 사용되곤 했다. 하나님께서도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이사야 41:14) 하심으로 그렇게 잘 살아보려고 애썼던 야곱의 삶이 실제로는 참으로 가련하고 고통스러우며, 무기력하고 무가치한 삶이었음을 말씀하셨다.  

그렇게 성공적인 삶을 살기위해 열심히 살았던 야곱이 왜 이런 부끄러운 이름으로 남게 되었을까? 그는 이 땅의 것을 채움에 결코 만족함이 없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채워짐이 없는 부족함과 이로부터 오는 부자유!  그리고 그 부자유를 극복하고자 끝없이 투쟁했던 그의 삶 속에서 우리는 야곱이 얼마나 부자유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갔는지를 상상할 수 있다.  

후에 그 아들 요셉과 함께 이집트 왕 앞에 섰을 때 그는 자신의 130년 인생을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했다.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창 47:9)  끝없는 욕심이 주는 끝없는 부족임, 그리고 부자유! 험악한 세월을 살아간 야곱은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수많은 궁녀를 두고도 충신의 아내를 범함으로 나머지 인생을 고통가운데 살았던 다윗이나,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리고도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 1:2) 한 솔로몬을 보면 인간의 삶 속에 자유와 만족이 없음이 확실하다. 


왜 인간은 자유하지 못한가

인간이 자유하지 못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근본적으로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 본성에 그 근본 원인이 있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천하보다 귀한 존재로 창조’(창 1:26-28; 마 16:26) 하셨기에 온 천하 만물을 소유하기 전까지 인간에게 만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여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을 끝까지 붙잡으려하는 부질없는 욕망이 부자유의 근본 이유이다. 아담과 하와 조차도 에덴동산에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해 인간을 넘어 하나님처럼 되고자 선악과를 범했다. 

인간이란 관계적 존재이기에 나의 만족은 반드시 타자의 부족을 유발시키고 타자의 부족은 또다른 나의 부족으로 연결된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진다는 것은 타자에게는 파괴적이고, 인간 양심에 비추어 볼 때 비도덕적이며, 사회적으로 정의롭지 않으며,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반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스스로 만족하고 자유롭게 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 땅의 삶을 통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욕망’ 을 추구하는 한 참 자유와 참 만족은 없다.  진실로 인간은 ‘나와 너’가 함께 자유함을 누리고 살아온 역사적 경험이 없다.   

그러면 결코 소유할 수 없음에도 그렇게 포기하지 못하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요 8:31-34 을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자유케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실 때, 유대인들이 “우리가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라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니라.” 고 말씀하심으로 자유의 문제는 죄의 문제이며, 예수님이 주시는 참 자유를 얻지 못하면 죄의 종, 즉 죄의 노예이기에 이룰 수없는 욕망을 끊임없이 추구하다가 만족함 없이 영원한 형벌로 들어간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멸망케하는 죄를 ‘말씀을 믿지않고 말씀대로의 삶, 죽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지 않는 것' 이라 하셨다.   죄가 우리의 자유를 빼앗고 우리를 망하게 한다는 것은 인간의 양심도 증거 하는 바이다.


무엇이 우리를 자유케 하는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요 8:31b-32) 말씀하셨다. 바울도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7:23)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우리의 자유를 빼앗되 영원히 빼앗아 멸망으로 인도하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시되 영원토록 주시는 그리스도 구세주 되신다. 

참 자유는 이 땅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에서 완전히 실현 되겠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 17:21) 는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그 자유를 이 땅에 사는 동안 경험할 수 있다.  

그 방법이 무엇일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 속에 해답이 있다. 참 자유는 주님께서 가신 길을 갈 때 경험되어지는 것이다. 

불의를 못 참는 것 쉽다.  용감히 할 말 다 하는 것도 쉽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으로 침묵하고 기도하며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사랑과 용서의 근원은 나에게 있지 않음을 알아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모든 이를 사랑하며 섬기는 제자의 길을 갈 때 주님께서 주시는 자유와 평강의 은혜가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이며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의 힘이다.  

한경직 목사님의 소박한 유품, Time 표지에 실렸던 데레사 수녀의 낡은 구두 한 결레와 겉옷 한 벌, 그리고 “실천이 있어야 참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별다른 유품도 남기지 않으시고 우리 곁을 떠난 김수환 추기경님.  우리는 그분들의 마지막 모습에서 자유함을 본다.   

무엇이 우리를 자유케 하는가!  이제 그 답은 우리 자신들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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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엇이 우리를 자유케 하는가 (요한복음 8:31,32)
  • 2012-09-05
  • 박덕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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