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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로마서 12장 14-21절)

  • 박덕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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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신학교를 다닐 때 나는 내가 목사가 되어 설교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거꾸러져 회개하고 새사람이 될 줄 알았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특별이 나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주님을 사랑하는 헌신된 종이라는 착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착각은 쉽게 나를 영적 교만과 자기 의 (self-righteousness) 에 빠지게 했다.

■ 신앙과 신념

나는 하나님 말씀으로 모든 사람들을 정죄하는 예언자적 검사요, 내 앞의 세상은 피고인니거나 자기 죄를 끝까지 부인하는 파렴치한 악인들이었다. 나는 그렇게 세상을 정죄했고, 세상을 정죄하면 정죄 할수록 나는 더욱 더 의로운 사람이 되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진리가 아닌 나 자신의 신념을 위해 끝없이 싸우는 의로운(자기 의) 투사였다. 당연히 내 주위에는 적들이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고 치졸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죄에 대한 깊은 회개와 이 회개를 가능하게 하는 은혜에 대한 깊은 체험이 없었다. 단지 예수님은 나의 신념을 이루어 나가기 위한 도구였기 때문이었다.

■ 하나님의 눈은 우리의 눈과 다르시다

그 날도 나는 늘 하던 대로 “주님! 저런 악한 사람이 더 이상 교회에서 설치지 못하게 하시어 하나님의 공의가 이 교회 위에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특별한 이유 없이 담임목사를 끈질기게 괴롭히며 교회를 마치 자신의 회사를 운영하듯이 좌지우지하려고 하는 그 장로에 대한 하나님께서 공의로운 심판만이 교회의 거룩성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섬기는 담임목사를 눈물 흘리게 하는 그 장로에 대한 인간적인 분노도 적지 않았었다.

한참을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얘야 ! 너 좋은 목사가 되고 싶지?” “나는 너무도 놀랍고 신비해 나도 몰래 큰 소리로 외쳤다!” “예 하나님! 저 정말 좋은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애야! 그런데 말이다. 네가 그렇게 미워하는 저 장로도 좋은 장로가 되기 위해 너 만큼 애 쓴단다!” 그 날 들은 하나님의 영음은 나로 하여금 목회가 무엇인지 깨닫게 했다.  

■ 왜 우리는 평화하지 못하나

우리가 다른 사람과 평화하지 못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 속에 잠재되어 있는 죄와 이로 인한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은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하지 못함으로 인해 오는 죄의 결과였다. 아담이 범죄 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부르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는 모습에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 깨어진 평화’의 모습을 보게 된다. 남을 정죄하고, 다투며, 오래 참지 못하는 이 모든 삶의 왜곡은 자신의 깊은 곳에 참된 평화가 없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의 모든 서신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안” 으로 수신자들을 문안하였으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려움 속에 싸여있는 제자들에게 하신 첫 번째 말씀도 “평안” 이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그것은 은혜와 그 은혜가 주는 참된 평안이 참 그리스도인과 거짓 그리스도인을 구별하는 중요한 시금석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는데 우리가 세상을 정죄한다면,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주셨는데 우리가 나의 신념을 위해 다른 이들과 다툰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좋아하기는 하나 사실은 부정하는 자들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것 같으나 사실은 모르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내게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있을 때 우리는 다른 이들과 평화를 이룰 수 있다. 또한 신앙이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속에 계신 예수님께서 이끄시는 삶을 따라가는 것이므로 얼마나 모든 이와 평화 하느냐가 현재 그 사람의 신앙상태를 나타낸다.

■ 너와 나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 중에는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들도 있지만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사람들도 많이 있다. 인간관계를 통해 고통을 많이 받았던 사람일수록 모든 이와 평화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란 나의 선택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피할 수 없다.

우리 속담에 “미운사람에게 떡 하나 더 준다.” 란 말이 있다. 어려운 일이지만 이렇게 해야 우리는 모든 사람들과 평화할 수 있고 우리는 가능한 고통으로부터 해방 받을 수 있다. 우리 선조들이 삶에서 터득한 지혜이다. 사실 신앙생활의 성숙도 여기에 달려있다. 나는 개인의 영성도 이것으로 측정할 수 있다고 본다.

나는 종종 나의 세 아이들에게 “애들아! 여기 사탕 10개를 둘이 나눠 가진다고 하자! 어떻게 나눠야 공평하니?” 묻고 나서 끊임없이 가르치는 것이 있다. “남에게 6개 주고 네가 4개 가지는 것이 공평한 것이란다.” 나는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 평화에의 첫 걸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할 수 있는가? 성경 로마서 12:14-20 에 그 답이 나와 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겸손하고 겸비하라.”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원수를 갚지 말고 도리어 원수를 사랑하고 보살피라.” 그리하여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우리가 모르는 것이 아니다. 결국 ‘나에게 실천할 수 있는 믿음과 능력이 있느냐?’ 인데 이 모든 것이 은혜로부터 나온다. 성경 말씀이 어려우면 “미운 사람에게 떡 하나 더 주라” 는 선조들의 지혜부터 실천함도 좋은 시작이 될 것이다.

■ 목사님! 착한 개는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있나요?

얼마 전 주일 예배 후 한 성도가 나에게 찾아와 물었다. “목사님! 착한 개는 천국에 갈 수 있나요?” 혼자 어렵게 살아가면서 여러 마리의 개를 키우고 있는 이 여성에게 개는 한 식구요, 삶을 나누는 사랑의 대상이며 정 붙이 일 것이다. “그럼요! 성도님께서 천국에 가시면 먼저 간 개를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어떤 목사님은 개는 영혼이 없어서 천국에 못 간다고 하던데........” 아무리 착한 개라도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한 목사님의 말이 맞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목사님은 교리적인 접근을 한 것이고 나는 목회적인 접근을 한 것만 다를 뿐이다. 목회란 평화에의 권면이다.

언젠가 우리가 천국에 가면 더 이상의 모든 사람과 평화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때 까지 모든 사람과 평화 하는 첫 걸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로부터 시작되는 다른 이들에 대한 너그러운 이해와 폭 넓은 관용이다. 왜냐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은혜와 평안이 없이는 우리 속에 있는 두려움을 이길 자가 이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우리 자신과의 평화! 이것이야말로 모든 이와 화평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맛보는 삶이 될 것이다.



 연상희

2012-06-18 23:09

아멘. 미운 놈 떡 하나 더준다라는 말이 참 와 닿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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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로마서 12장 14-21절)
  • 2012-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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